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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가볼만한 곳

퇴계가 거닐던 곳에서 거닐어보며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을 느낄 수 있는 힐링 추천 산책 코스 도산서당을 소개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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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에 가면 들러야하는 곳

예상외로 이미 주차장은

많은 자동차가 들어차 있었습니다.

 

퇴계 이황 선생이 지내던 도산서원까지는

큰 길을 따라 200m 남짓 남았다.

낙동강 물에 잠긴 옛길을 대신해

산을 깎아 만든 길로 왼쪽으로는

산을 감싼 커다란 돌 벽이,

오른쪽으로는 우거진 나무 뒤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내려보였다.

참새가 지저귀고

평온이 맴도는 파라다이스다.

도산서원 앞을 다다랄 쯤 낙동강 가운데 섬 하나,

우거진 소나무 사이로 건물이 보였다.

정조는 평소 존경하던 퇴계 이황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시대 특별 과거 시험을

영남지역에서 치루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유형문화재 33호 비석과 비각이 세워진

‘시사단’이다. 시험 응시자만

7천여 명이었던 만큼

퇴계 이황 선생의 위대함의

전율이 느껴진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잠겼을지 모를 시사단.

정조가 은덕을 베푼 걸까?

10m 높이의 돌로 축대를 쌓은 후

옛 건물과 비석을 그대로 옮겨 살아남았다.

450년 이상 된,

존재감부터 남다른

왕 버들 나무가 첫 만남이다.

그 옆으로 열정이란

샘물과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다.

여기서 느티나무의 존재도 남다르다.

눈으로 보아선 4개의

나무 같지만 실은 한그루이다.

흙을 돋으면서 몸은 땅속에 묻히고

가지만 올라온 형태가 신기할 따름이다.

도산서원을 둘러보기 전부터

놀람에 기절초풍 같은 입문에 들어섰다.

 

 

서원의 정문을 넘어서니

도산서원 앞 공터의 놀람은

계속 이어졌다.

오른쪽으로는 도산 서당

왼쪽으로는 농운정사와 하고직사다.

대부분의 건물은 퇴계 선생이 설계를 하였다.

특히 도산 서당은 설계 뿐 아니라

직접 짓는 것까지 손길이 닿았기에 애착이 간다.

여기에서 농운정사

공부를 하는 제자들의 기숙사로

특이한 점도 있다.

퇴계 선생이 직접 설계했다는

농운 정사는 지붕의 모양이

‘공’자로 되어 있는 게 특징이다.

이는 학생들의 공부가 성취되기를 바라는

퇴계 선생의 따뜻한 마음이다.

1590년에 완성된 도산 서당은

퇴계 이황 선생이 잠을 자는 공간이자,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퇴계 선생이 가장 오랜 머문 장소이다.

10평 남짓 되는 마루에서 제자를 가르쳤고,

1평쯤 되는 좁은 공간에서 잠을 청했다.

나름 해석을 해본다면 잠 보다 학구열이 강했다.

불타는 열정에 제자의 수는 늘어나

마루를 확장하며 덧지붕을 달았다.

낙동강의 정기를 받으며 공부했을 그 당시의

학생들은 어떤 마음이었을지 궁금해진다.

 

 

도산서당, 농운정사, 하고직사,

역사서재를 비롯해 진도문 앞까지를

도산서당이라 말한다.

1570년 퇴계 이황 선생의 사후 4년이 지나고

제자들에 의해 전교당, 삼문,

상고직사(서원을 관리할 사람이 지낸 곳),

장판각(목판을 보관하는 장소),

전사청(제사를 준비를 위한 장소)지어지며

도산서당이 아닌 도산서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것으로 족했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지나며 책의 보관할 장소가 부족해졌다.

이로 1819년 동명광실,

1930년 서명광실을 지으며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됐다.

 

전교당은 도산 서원의 강당으로

1574년에 만들어졌으며,

현판은 1575년 선조가 이름을 내려

1575년 동왕 8년 한석봉이 글씨를 썼다.

전교당을 중심으로 농운정사와 같은

제자들이 지낼 기숙사인 홍의재, 박약재가 있다.

전교당 오른쪽 뒤편으로 삼문을 지나

퇴계 선생과 제자 조목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상덕사가 있다.

명필가라면 누구나 도산서원의

현판의 글을 쓰고 싶어 경쟁이 치열하다.

그중에 선조로부터 글을 부탁받게 된 한석봉.

글의 내용도 어디에 사용 될 용도도 모른 채

글을 쓰기 시작한다. “院書山陶”을 거꾸로

한 글자 한 글자. ‘원’자를 쓰고,

‘서’자를 쓰고 다음으로 ‘산’을 쓸 차례다.

그때 한석봉은 비로소 눈치를 챈다.

“아~ 도산서원이구나.” 그때부터 긴장과 부담이

한석봉의 몸을 지배한다.

손을 떨리며 정신이 혼미해지며

긴장한 탓에 현판의 ‘뫼산(山原)’자를 실수에

이르게 된다. 양쪽 두 획이 짧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떠한 서원을 찾아도 볼 수 없는 보물과 같은 게

도산서원에는 있다.

그건 두 개의 나무목판에 적힌 글귀로 어명이 아닌

어필이기 때문이다.

왕이 직접 글을 써 황금보자기에 봉해

도산서원으로 내려 보냈다.

서원에 있어서 어필은 유일무이하다.

퇴계 이황이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

살짝 엿볼 수 있는 증거이다.

도산서원의 도산은 지역 이름을 딴 것으로

질그릇을 굽던 곳이었다는

이야기와 같이 산의 모습이

빚은 것처럼 보여 도산이라 전해져 온다.

그만큼 진도문 앞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광은

제자를 기르며 학문을 쌓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1969년 보수작업을 하면서

농운정사의 시선이 담벼락에 막혀 버린 것.

전교당에서 훤히 보이던 낙동강은

동광명실로 막혔다.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주는 것은

퇴계 이황의 거쳐 도산서당이다.

마루에 앉아 싸리문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을 퇴계 이황의

따스한 미소가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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