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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과학

방통대, 철학과, 인문학 등 주요 과목 인간과 과학 핵심 요약 요점 정리 4. 근대과학의 형성: 근대 천문학, 근대 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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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근대과학의 형성: 근대 천문학, 근대 역학

 

근대 이전 천문학자들과 일반인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지구중심의 우주체계는 근대 천문학이 확립됨에 따라 태양 중심의 우주체계로 바뀌었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라는 책에서 중세 이래 처음으로 태양 중심의 우주체계를 제시했다.

그렇지만 그의 우주체계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고,

원운동에 집착한다든가 천구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는 등 많은 헛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헛점은 독일의 천문학자 케플러가 티코 브라헤가 남긴 관측 자료를 가지고

케플러의 세가지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완전히 보완되고, 그에 따라 태양중심의 우주체계가 거의 완벽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후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가지고 천체를 관측해서, 달의 모습과 목성의 위성 등을 발견함에 따라서

태양중심 우주체계는 일반인들에게도 퍼지게 되었다.

 

천문학 혁명은 1687년 뉴튼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보편 인력의 법칙을 발표하고,

행성의 궤도가 타원이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함으로써 완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우주체계

 

고대 그리스에서는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축적된 천체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지구 중심의 우주체계가 나오게 되는데,

이 작업은 플라톤에서 시작되었다.

 

플라톤은 지구를 중심으로 행성과 별들 그리고 태양의 수정 천구가 원운동을 하면서 돈다는 우주체계를 제시했고,

그후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물질이론을 바탕으로 이 지구중심체계를 정성적으로 매우 정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스에는 지구중심의 우주체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기원전 6세기에 피타고라스의 제자 필롤라오스는 우주의 중심에는 불이 있고 태양과 지구는 이 불 주위를 돈다고 했고,

기원전 4세기에 활동했던 헤라클레이데스 (기원전 388-310)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지만 자전을 하고 있고, 금성과 수성은 태양 주위를 도는 우주체계를 제시했다.

 

 

 

기원전 3세기에는 아리스타르코스 (기원전 310-230)가 코페르니쿠스 체계 즉 태양중심 체계와 거의 같은 우주체계를 내놓았다. 그렇지만 아리스타르코스의 체계는 물리적인 면과 종교적인 면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는 수직으로 던져진 돌이 뒤에가서 떨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떨어지는 점을 설명하지 못했고, 종교적으로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신에 대한 불경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에 사람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은 지구중심의 우주체계였다.

 

 

 

지구중심의 우주체계는 2세기에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수학적으로 거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고대에는 오래 전부터 행성의 역운동, 행성 속도의 불균일성 등이 알려져 있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는 여러가지 기하학적 도구를 도입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그는 역운동은 소원이란 것을 도입해서 설명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프톨레마이오스는 모든 천체 현상을 수학적으로 정밀하게만 설명하려 한 결과 수없이 많은 천구가 뒤엉켜서 돌고 있는 아주 복잡한 우주체계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가지고 있었던 더 커다란 문제는 그의 체계에서는 플라톤 이후로 지켜져 왔던 완전한 원운동이라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과 결합해서 고대와 중세의 지배적인 우주체계가 되었다.

 

 

코페르니쿠스

르네상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체계에 처음으로 반대되는 생각을 한 사람은 코페르니쿠스였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세례를 흠뻑 받았으며, 그 영향으로 우주는 단순성, 질서, 조화의 지배를 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에게 수학적으로는 정교하지만 너무 복잡하고 게다가 원운동마저도 부정하는 낡은 지구중심의 우주체계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지구중심의 우주체계보다 더 낳은 우주체계를 모색하던 코페르니쿠스는 고대의 헤라클레이데스나 아리스타르코스의 생각에 접하게 되었고, 1510년 경에 이미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코멘타리올루스 (Comentariolus)라는 소책자에 자기 생각을 담아 유럽의 몇몇 천문학자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 생각을 오랫동안 공개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세상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의 우주체계는 그가 죽던 해인 1543년에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서 발표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우선 그는 행성들이 붙어서 돌고 있는 천구라는 개념을 그대로 사용했고,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원운동을 가장 완전한 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천구들이 원운동을 한다는 견해를 고수했다. 그래서 그는 관측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소원을 도입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나온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 마찬가지로 많은 천구가 뒤엉켜서 돌고 있는 복잡한 우주체계였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체계에서 지구와 태양의 위치만을 바꾸어 놓은 결과가 나오고 만 것이다. 그리고 또 지구가 태양주위를 돌면 시차가 관찰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관찰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었다. 이 시차는 별들이 지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시차가 관찰되지 않는 것에 대해 고대의 아리스타르코스와 같이 우주가 매우 크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설명을 했다. 그런데 지구가 태양주위를 도는 태양중심의 우주체계는 시차의 확인을 통해서만 완전하게 증명할 수 있는데, 이 시차의 확인은 19 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의 천문학자 베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지구가 태양주위를 돈다는 사실은 겨우 100 전에야 증명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뒤를 이어서 티코 브라헤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천체 관측 분야에서 대단히 뛰어난 업적을 남긴 관측의 천재였다. 아마 천문학 역사상 티코와 같은 관측의 천재는 그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티코는 덴마크의 벤이라는 섬에 하늘의 성 (Uraniborg)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대한 천체 관측소를 건설하고 정교하게 제작한 관측기구를 가지고 정열적으로 별들을 관측했다. 그런데 그는 수학적인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자신의 관측 자료를 가지고 어떤 획기적인 우주체계를 내놓지는 못했다. 그가 제시한 우주체계는 지구중심체계와 태양중심 체계를 혼합한 일종의 타협적인 것이었다. 티코의 우주체계에서는 지구가 여전히 우주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고, 수성과 금성만 지구 주위를 도는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이다.

 

 

케플러

 

근대 천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원래 루터파 성직자가 되려고 했던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다. 성직자가 되기 위해 독일 튀빙겐 대학의 교양학부를 졸업하고 신학부에 들어간 그는 신학부를 거치면서 신플라톤주의와 쿠자누스의 기하학적 신비주의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우주체계와 접하게 되는데, 그것들에서 아주 큰 감명을 받았다. 그의 글 곳곳에서 발견되는 신비주의적 성향은 이미 이때 형성되었던 것이다.

 

 

 

케플러는 1596년에 우주의 신비 (Mysterium Cosmographycum)라는 책을 출판하는데, 이 책을 내놓으면서 그의 천문학자로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우주의 신비 는 책 제목이 말하듯이 수학적 계산이 아니라 신비적인 사변에 의한 결과를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왜 우주에는 여섯개의 행성밖에 존재하지 않는가, 또는 신은 왜 여섯개의 행성을 창조했는가 라는 물음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 문제를 케플러는 신비적인 사변을 통해서 해결했다. 우주에는 정다면체가 다섯개밖에 존재하지 않는데, 케플러는 이 다섯이라는 숫자하고 행성이 여섯개라는 것을 결부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행성의 수가 여섯개인 이유는, 행성들이 여섯개일 경우 행성 사이에 정다면체가 들어갈 공간이 정확하게 다섯개가 나오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정다면체는 행성천구들 사이에 끼워지기 때문에 행성의 수는 여섯개를 넘지 못하는 것이다. 케플러는 이러한 사변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다.

 

 

 

1600년에 그는 티코 브라헤의 초청으로 프라하로 가는데, 거기에서 그는 화성의 궤도를 계산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런데 케플러와 티코가 함께 일을 한 지 1년 후 티코 브라헤가 왕실의 연회에 참석하고 온 뒤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래서 케플러는 티코가 남긴 매우 귀중한 관측자료를 모두 넘겨받아 약 5년 동안 화성의 궤도를 발견하기 위한 씨름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 케플러의 제일법칙과 제2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두 개의 법칙은 1609년에 출판된 새로운 천문학 (Astronomia Nova)이란 책에 들어 있는데, 1 법칙은 행성의 궤도가 타원을 그린다는 것이고, 2법칙은 행성과 태양을 잇는 선이 일정 시간 동안 휩쓸고 지나간 면적은 항상 일정하다는 것이다. 이제 케플러의 케3법칙이 남는데, 이 법칙은 그보다 훨씬 뒤인 1619년에 우주의 조화 (Harmonice Mundi)라는 책에 발표되었다. 이 책에는 우주에 관한 온갖 조화의 법칙들이 들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케플러의 제3법칙이다. 케플러의 제3법칙은 행성 주기의 제곱과 태양으로부터 행성까지의 평균거리의 세제곱의 비는 일정하다는 것이다.

 

 

 

갈릴레이의 발견

 

케플러가 자신의 이름이 붙은 세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아주 근대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천구와 소원이 사라졌고, 완전한 원운동이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도 제거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케플러의 노력에 의해서 태양중심의 우주체계가 거의 완벽해지기는 하지만, 그의 저작들은 너무 수학적이고 어려워서 천문학자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태양중심체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위해서는 수학적인 증명이 아니라 좀더 직접적인 증거가 나와야 했는데, 이 일은 갈릴레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갈릴레이는 1609년에 어느 홀란드 사람이 망원경을 발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가 직접 배율이 30배 되는 망원경을 제작해서 하늘을 관찰했다. 이 때 그는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달이 지구와 마찬가지로 울퉁불퉁하고 산과 골짜기를 가지고 있으며, 목성이 네 개의 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발견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구조를 완전히 뒤흔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상세계가 완전한 원소로 구성되어 있고 달도 거의 완전하다고 보았는데, 갈릴레이의 발견으로 하늘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이 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목성이 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이러한 발견을 1610년에 별들의 소식 (Sidereus Nuncius)이라는 책으로 발표했다. 이 발견으로 그는 하루아침에 유럽 전역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고 태양중심체계를 옹호하던 케플러 같은 사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후에도 갈릴레이는 관측을 계속해서 금성이 달과 마찬가지로 차고 기운다 즉 금성에 상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현상은 금성이 태양 주위를 돌 때만 관측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태양중심체계를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되었다. 물론 이 현상은 티코 브라헤의 체계로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태양중심체계의 결정적인 증거는 아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완전한 증거는 시차가 확인되는 것이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갈릴레이의 발견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유럽에서 상당히 널리 알려지게 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카톨릭 교회의 눈치를 보면서 타협적인 티코의 체계를 지지했다. 태양중심의 우주체계가 일반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은 17세기 중엽의 일이고, 그후 1687년에 뉴튼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rincipia philosophia mathematica naturalia), 일명 프린키피아를 발표하여 천문학과 역학을 결합함으로써 태양중심체계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프린키피아에는 만유인력의 법칙과 이 법칙에 따라 행성이 타원 궤도를 그리면서 돈다는 것이 수학적으로 증명되어 있다.

 

 

 

뉴튼은 이미 1665년 경에 케플러의 제3법칙으로부터 행성을 우주라는 허공에 붙들어 매는 힘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사실을 발표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뉴튼 말고도 여러 사람이 행성과 태양이 서로 끌어당기는 힘은 거리의 제곱에 따라 감소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만 수학적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 생각을 이용해서 행성 궤도를 계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국의 핼리라는 천문학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그는 1684년에 케임브리지에 있는 뉴튼을 찾아오게 되는데, 그는 뉴튼에게 인력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면 행성이 어떤 궤도를 그릴 것이냐고 물었다. 뉴튼은 그 자리에서 당장 자기가 이미 계산을 통해 증명한 대로 타원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후 프린키피아를 저술하기 시작해서 1687년에 이 기념비적인 저작을 출판했던 것이다.

 

 

 

근대 역학의 확립

17 세기에 일어난 과학혁명 중에서 일반인에게 가장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은 천문학 혁명이었다. 그 이유는 천문학 혁명이 일상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우주관의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 자체의 발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역학의 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역학의 성립은 물리학의 수리화와 근대화를 가져왔고, 더 나아가서 다른 과학분야들에도 양적인 접근을 하도록 자극하는 것과 같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를 천상세계와 지상세계로 구분했고, 운동을 자연운동과 강제운동으로 나누었다. 그의 자연운동은 세가지로 지상세계의 상승운동과 낙하운동 그리고 천상세계의 완전한 원운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상승운동과 낙하운동은 지상세계에서 물체를 구성하는 원소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위치를 찾아가려는 경향 때문에 일어나고, 천상세계의 자연스럽고 완전한 원운동은 하늘을 구성하는 아이테르라는 원소가 완전한 원소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낙하하는 물체는, 그것의 무게가 크면 클수록 그리고 그것이 통과하는 매질의 밀도가 작으면 작을수록 더 빨리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제운동은 항상 외부에서 물체를 움직여주는 힘이 있어야만 일어난다. 이는 우리가 수레를 끈다거나 배를 저어서 움직이는 일 등에서 자주 관찰되는 것으로서 그의 강제운동에 관한 이론은 전적으로 일상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공중에서 날아가는 투사체 운동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이 없이도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운동이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투사체 주위에 있는 매질을 끌어들여서 그것이 물체에 힘을 가하는 동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투사체 운동이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낙하운동과 투사체 운동에 관한 이론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진공의 존재를 부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중세 후기가 시작될 무렵에도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지만,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서 유명론자들을 중심으로 조금 근대적인 생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진공 속에서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에 관한 논의이다. 이러한 논의를 했던 사람들은 우선 진공이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그리고 진공 속에서 낙하하는 물체들의 속도는 그것들이 만일 동일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을 경우에는 무게에 상관없이 항상 똑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예를 들어서 진공 속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속도는 그것이 크든 작든 모두 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항상 같다는 것이다.

 

 

 

근대역학의 탄생

 

근대 역학은 갈릴레이에서 시작되었다.

갈릴레이는 피사대학에서 공부할 때부터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비판적이었지만,

그의 초기 역학연구는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의 전통을 따르는 중세 후기의 운동이론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갈릴레이는 16, 17세기의 신플라톤주의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그의 저작 속에는 세계란 신적인 수학이 실현된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수학이 매우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으며,

수학으로 파악할 수 없는 현상들은 과학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해서 목성의 위성과 금성의 상변화 등을 발견함으로써 천문학 혁명에 크게 기여한 바 있지만,

대학에서 공부할 때부터 그의 주된 관심은 운동의 문제였다.

그는 이미 피사 대학에 다닐 때부터

진자의 주기는 진폭에 상관없이 일정하다는 진자의 등시성(等時性)을 발견했고,

1590년 경에 피사대학에서 수학을 강의하는 동안에는 운동에 관하여 라는 습작 노트를 쓰기도 했다. 그후 피사 대학을 그만둔 뒤 1592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에 있는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대학 중의 하나였던 파도바 대학으로 옮겨갔는데, 여기에서 1610년까지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치는 동안 투사체가 포물선을 그리면서 움직인다는 이론과 초보적인 관성개념 그리고 낙하운동에 관한 새로운 생각 등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 이론들을 더 다듬어서 근대 역학의 뼈대를 세우기 전에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가지고 새로운 천문학적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는 그후에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옹호하는 일에 주된 관심을 쏟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1633년에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 체계를 옹호한 두 개의 대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 라는 책을 출판한 댓가로 종교재판을 받는 등 호된 수난을 겪기도 했다. 갈릴레이는 이 재판을 받고 연금상태에 들어간 뒤에 자기 집에 칩거하면서 그의 역학에 관한 역작인 두 개의 새 과학에 관한 논의 를 집필할 수 있었다. 이 책은 1638년에 출판되었으며, 거기에는 역학에 관한 그의 사고의 최종 결과가 집대성되어 있다.

 

 

 

갈릴레이의 역학은 상당히 복잡한 진화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중세 역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전의 학자들과 달랐던 점은 아리스토텔레스나 중세 자연철학자들은 대부분 운동을 양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것에 비해서 갈릴레이는 운동을 양적으로, 다시말하면 수학적으로 기술하려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같은 운동에 대한 수학적 기술은 아르키메데스의 영향을 받아서 나타난 것인데, 바로 이러한 운동의 수학적 기술이 갈릴레이의 역학을 성공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갈릴레이는 초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내려온 전통에 따라 운동의 원인이나 목적을 찾는 일에도 주의를 기울였지만, 그의 연구가 진전되면서 운동 자체를 정확하게 기술하는 데만 주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낙체와 투사체의 운동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갈릴레이는 운동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던 초기부터 낙체의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여러가지 오류를 거듭한 끝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낙체의 두가지 법칙을 제시할 수 있었다. 갈릴레이는 낙하하는 물체가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지고 떨어지는 것은 매질 때문이라고 가정했다. 이러한 가정은 비중이 서로 다른 여러 물체를 밀도가 다른 매질 속에서 통과시켰을 때 가벼운 물체가 밀도가 높은 매질 속에서는 대단히 천천히 떨어진다는 사실에서 도출한 것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갈릴레이는 진공 속에서 물체가 떨어진다는 사고 실험을 설정하여 그 속에서는 모든 물체가 똑 같이 빨리 떨아진다는 낙체의 제1법칙을 도출했다. 갈릴레이는 이 사고 실험에서 그의 독특한, 그리고 근대과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상화라는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여기서 진공이 정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제기되지 않으며 실제 상황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이상적인 상황으로서 진공이 가정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엄격하게 경험적인 방식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갈릴레이의 낙체의 제2법칙은 낙하하는 물체가 통과한 거리는 낙하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갈릴레이는 발사된 대포알 같은 투사체의 궤도가 포물선을 그린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위로 올라가는 강제운동과 밑으로 떨어지는 자연운동이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 따랐고, 따라서 대포알이 발사되면 처음에는 강제운동에 의해서 직선으로 날아가다가 그 힘이 다하면 자연운동이 시작되어서 곧바로 낙하운동에 들어간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강제운동과 자연운동이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처음으로 물체는 동시에 두가지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매우 획기적인 생각을 했다. 그 결과 대포알의 운동과 같은 투사체 운동은 수평 방향의 등속운동과 수직 방향의 등가속도 운동이 결합된 것으로 단순화할 수 있으며, 이 경우 대포알의 궤도는 포물선이라는 것이 증명될 수 있었다. 이것은 갈릴레이가 복잡한 운동을 간단한 요소로 분해해서 취급할 수 있다는 운동의 복합법칙을 사용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 한가지 갈릴레이의 주장 중에서 중요한 것은 지구의 자전과 관련된 것인데, 그는 지구가 돌 때 수직으로 던져진 물체가 뒤로가서 떨어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지구상의 모든 물체는 지구의 원운동을 그대로 지니며 돌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가 물체를 던졌을 때 그것이 수직방향으로는 등가속 운동을 하지만, 수평방향으로는 지구의 원운동과 똑같은 운동을 하기 때문에 같은 자리에 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으로부터 영원한 운동이라는 초보적인 관성개념의 싹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지구 표면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지구와 함께 영원히 운동을 한다는 생각도 관성이란 개념과 연결되는 것이지만, 또한 그 운동 외에 수평방향의 속도를 지니고 있을 경우, 이 물체는 다른 방해를 받지 않는 한 수평방향으로 계속해서 움직일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의 사고실험을 고안했다.

 

 

 

갈릴레이는 단단하고 매끄러운 공을 단단하고 마찰이 없는 경사면에서 굴리는 경우를 가정했다. 이때 공은 아무런 저항이나 마찰을 받지 않으므로 다른 쪽 면에서도 처음 면과 같은 높이에 도달할 것이다. 그런데 그 후에 한쪽면을 계속해서 낮추어 주다가 수평면과 같은 높이까지 낮추면 공은 마찰없는 수평면을 지나가는 셈이 될 것이다. 갈릴레이는 이때에 공은 처음 면의 높이와 같은 높이에 도달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수평운동을 끊임없이 계속할 수밖에 없다 라고 하는 식으로 증명을 했다. 이것은 운동하는 물체가 방해를 받지 않는 한 그 운동을 계속하려 할 것이라는 관성이론과 비슷한 면이 있다.

 

 

 

갈릴레이의 초보적인 관성개념은 그후 데카르트에 의해서 직선운동의 관성개념으로 확장되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해서 우주는 신이 정한 완벽한 법칙에 따라 질서있게 운동하는 물질로 가득 차 있다는 기계적 철학을 만든 사람으로 유명하다. 여기서 그는 운동은 하나의 상태이고 그렇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변화가 가해지지 않는 한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 한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여기에 관성의 원리가 들어있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운동은 기본적으로 직선방향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운동하는 물체는 모두 항상 직선경로를 따르려는 경향이 있으며, 방해를 받지 않는 한 그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는 직선 관성운동이 도출되었던 것이다.

 

 

 

뉴턴은 만유인력을 도입하여 행성의 궤도가 타원이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천문학 혁명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뉴튼은 <프린키피아>에서 만유인력과 여러가지 운동의 법칙을 제시함으로써 역학의 혁명도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프린키피아 제1권에는 질량이나 운동양 등에 관한 정의와 뉴튼의 운동에 관한 세가지 법칙이 나와 있다. 뉴튼의 제 1법칙은 모든 물체는 외부의 원인에 의해서 방해를 받지 않는 한 정지 상태나 직선등속 운동 상태를 자연스럽게 지속한다는 관성의 법칙이다. 물론 이 법칙은 갈릴레이와 데카르트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2법칙은 운동의 변화와 힘의 관계에 관한 법칙으로 운동 중에 일어나는 변화는 가해진 힘에 비례하고, 그 힘이 가해진 직선의 방향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3법칙은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로서 두 물체 사이의 힘과 그 반대 힘은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라는 것이다.

 

 

 

뉴턴이 물체들이 서로 끌어당기는 인력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은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에 널리 퍼졌고 길버트의 자석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헤르메스주의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헤르메스주의는 우주는 신비한 힘들로 짜여진 그물과 같은 것이고 이 힘들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인간도 이 힘들과 작용해서 자연세계의 현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같이 멀리서 힘들이 작용한다는 생각이 인력이란 개념의 형성에 기여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헤르메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뉴턴만 인력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다. 뉴턴의 경쟁자였던 영국의 로버트 후크도 인력이 거리에 비례해서 감소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턴이 다른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던 점은 그가 만유인력의 법칙과 그의 운동법칙들을 사용해서 행성의 운동을 기술하는 케플러의 세가지 법칙을 수학적으로 유도해 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다시 말하면 태양과 행성 사이에 인력이 존재하며 행성들의 운행이 보편인력과 뉴턴의 운동법칙에 의해서 수학적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것에 의해서 뉴턴 역학은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렇게 해서 근대역학이 확립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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