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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과학

방통대, 철학과, 인문학 등 주요 과목 인간과 과학 핵심 요약 요점 정리 3. 근대과학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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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대과학의 형성

- 유럽 중세 시기 :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침입에 의해서 붕괴되기 시작하는 5세기 중엽부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등이 시작되는 14세기 말, 15세기 초까지를 말한다.

 

- 암흑시대로 표현......중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정당한 것은 아니다.

서양의 중세에도 계속해서 기술의 발전과 생산력의 증가가 있었고,

후기에 들어서면 학문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학문의 불모시대 : 서유럽의 중세 초부터 10세기 경까지

 

- 로마인들이 그리스인들이 남긴 찬란한 학문적 업적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로마 초기의 학자들이 그리스 학문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을 아주 등한히 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일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정도가 라틴어로 번역되어서 전해졌을 뿐이다.

 

- 중세 기독교의 책임

중세 초기의 기독교는 다른 어떤 학문보다도 성경연구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학문연구를 진작하기보다는 억제하는 면이 강했기 때문이다.

 

- 기술이 발달했는데,

중세에 기술 발달을 촉진한 요인 중의 하나는 노예 공급의 감소였다.

 

첫째 로마 제국이 세계 지배권을 상실한 결과 외부로부터 노예의 유입이 줄어든 것이다.

둘째 인간이 신 앞에서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하는 기독교 교리도 중세에 노예사용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3-1, 아랍 지역의 과학

3-1-1, 그리스 저작의 영향과 번역

 

아랍과학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이슬람 문화의 지배영역 속에서 발달했던 과학을 말한다.

아랍 과학은 8세기 중엽에 그리스 과학 저작들이 아랍어로 번역되는 번역 사업에 의해서 시작

처음에 아랍어로 번역된 것들은 페르시아어와 시리아어로 된 의학 및 천문학 관계 서적들이었다.

이 저작들은 비록 그리스어로 쓰여진 저작들이 아니었지만, 그리스 과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거나 그리스 저작의 번역본들이었다.

 

시리아어나 페르시아어 저작들이 어느 정도 번역되고 나서 그리스어로 쓰여진 서적들이 번역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불과 수십년 안에 고대의 중요한 과학연구서들이 아랍어로 옮겨질 수 있었다.

 

3-1-2, 칼리프의 지원

 

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 번역작업이 칼리프의 지원을 받으면서 매우 왕성하게 진행되었다.

-마문이란 칼리프는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연구 센터를 세우고,

거기에 여러 지역으로부터 많은 학자들을 초빙해서 번역과 연구활동을 지원했다.

바그다드의 연구 센터에서는 그 지역에서는 구할 수 없었던 그리스어 저작들을 구하기 위해서

동로마 제국으로 여러 차례 사람들을 보내 그리스어 저작들을 사들인 다음에 그것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이 번역활동의 결과로 플라톤의 저작들과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등의 저작들이 번역되었고,

그외에도 거의 모든 과학분야의 저작들이 번역되었다.

 

3-1-3, 이슬람 문화의 형성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시대의 많은 저작들이 번역된 후 이슬람 세계에서는

이 새로운 지식을 소화하는 작업과 함께 그것을 바빌로니아,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 등지의 지식과 결합시키는 작업이 일어났고,

또한 여러 면에서 그것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키는 활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각 부문에서 뛰어난 연구업적을 내놓은 학자들이 나왔으며,

그 중에서 유럽에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으로는

-킨디, -하이셈, 그리고 아비케나, 아베로에스 같은 학자가 있었다.

이들의 연구는 이슬람 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유럽으로 전파된 후에는 유럽 중세의 과학이 형성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랍 과학은 11세기 초에 전성기에 도달했는데,

 

그 후 12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천문학만 제외하고는 더 발달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학문에 적대적인 이슬람 정통파가 득세했고,

아랍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나빠진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도 천문학은 15세기까지 계속해서 발달했지만,15세기가 되면 아랍 과학은 완전히 정체되고 만다.

 

3-2, 아랍 과학 도입과 중세의 대학

 

3-2-1, 아랍 과학의 유입 및 라틴어 번역

 

- 아랍어로 번역된 그리스 학문과 이슬람화된 그리스 학문의 본격적인 유입은

11 세기 말에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 남부의 톨레도와 시칠리아 섬이 함락됨으로써 시작

 

- 아랍 문화가 상당한 기간 동안 번영했던 이 지역이 다시 유럽의 손에 들어감에 따라서

유럽은 많은 그리스, 아랍 학문의 원천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 지적인 기아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 유럽인들이 아주 열성적으로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 라틴어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12세기 초부터 많은 학자들이 유럽의 전 지역으로부터 스페인과 남부 이탈리아로 몰려들었고,

닥치는대로 새로운 지식을 번역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전체가 번역되었고, 갈레노스, 프톨레마이오스, 아르키메데스 같은 학자들의 그리스, 헬레니즘 학문이 번역되었다.

아비케나나 아베로에스, 그리고 알-킨디, -하이셈 같은 이슬람 학자들 고유의 저작들도 상당수 번역되었다.

 

- 이 번역은 그리스어로부터 직접 번역된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가 아랍어본의 번역이었으며,

아랍어에서 스페인어를 거쳐서 라틴어로 번역되거나 아랍어에서 히브리어를 거쳐서 라틴어로 번역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들어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 12세기 르네상스 : 12세기에 활발하게 일어났던 번역 작업과 이로 인한 학문의 팽창

 

3-2-2, 대학 설립

 

3-2-1-1, 새로운 교육기관의 필요성

 

- 번역으로 인한 학문의 양의 엄청난 팽창은 새로운 교육기관인 대학의 설립을 가져왔다.

대학이 설립되기 전까지 중세에서 교육을 주로 담당했던 기관은 수도원 학교와 성당 학교였다.

새로운 학문에 대해서 적대적이지는 않았지만

신앙의 보존, 전파, 해설이라는 그들의 본래 목적이 부과하는 제한 때문에 새 학문을 발전시킬 만한 역량은 갖추고 있지 않았다.

 

- 새로 출현한 교육기관인 대학이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대학은 12 세기 말 경부터 프랑스의 파리, 영국의 옥스포드, 이탈리아의 볼로냐와 파도바 등지에서

교수와 학생의 자치조합 또는 학생들만의 자치 조합의 형태로 나타났다.

 

- 이 대학들은 보통 교양학부, 법학부, 의학부, 신학부라는 4개의 학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학들에는 유럽의 전 지역에서 학생과 교수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유럽의 명실상부한 학문중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 대학의 학부 중에서 신학부.법학부.의학부는 교양학부를 거친 다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교양학부에서는 인문학 분야라 할 수 있는 삼학 (문법, 수사학, 논리학)

자연과학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사학 (산학,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 주로 가르쳐졌다.

 

-13 세기 초에 교양학부의 주된 교과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과학, 철학 같은 학문이 차지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거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고 있고 서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3-2-1-2, 아리스토텔레스와 기독교

 

-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철학자들 중에서 자연주의적 전통에 서서 학문연구를 했기 때문에

그의 학문에는 기독교 교리에 위배되는 사상이 담겨 있었다.

 

- 신학자들과 교양학부의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들 사이에서는 마찰이 빚어지게 된다.

교양학부 교수들은 중세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자라고 불리웠던 아랍의 아베로에스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신앙과 과학의 영역을 분리

신앙은 신앙의 영역 속에서

과학은 과학의 영역 속에서 고유한 진리를 가지고 있으며,

자연 탐구란 과학의 영역에서 이성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았고

자연탐구라는 영역을 떠나서는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이중진리설 : 과학과 신앙의 영역을 분리하고 각 영역에 고유한 진리가 있다는 생각

당연히 과학의 영역에서 기독교의 근본 교리에 위배될 수도 있는 것을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바와 같이 세계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한다고 가르쳤고,

영혼은 불멸이 아니라 육체가 소멸하면 함께 없어진다고 하는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신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내용을 담은 세계는 인과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

 

- 교양학부 교수들과 신학자들 사이의 충돌

자연주의적 합리주의의 태도는 신학자들의 반발을 샀으며,

13 세기 초부터 시작된 이 아베로에스주의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의 마찰,

자연철학과 신학의 충돌에는 주교와 교황까지 개입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에 대한 단죄(condemnation)가 단행

 

1277. 단죄와 금지된 명제

 

1277 년에 파리에서 내려진 단죄

가장 정도가 심했고 그 후 중세학문의 발달 경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은,

 

파리 교구에서는 교양학부 교수들의 가르침 중에서 219 개의 명제를 지정하여 그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공고

이 명령을 어긴 사람은 교회에서 바로 파문당했고, 파문 당한다는 것은 학자로서의 생명이 끝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이 단죄는 매우 무서운 것이었다.

 

- 금지된 명제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

 

세계에서 유일한 현자는 철학자들이다.(신학자들에 대한 모욕)

아무 일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고 모든 일은 필연에 의해 일어나며, 장래에 일어날 모든 미래의 일은 필연적인 것이다.

최초의 원인()은 여러 개의 세계를 만들 수 없었다.

적당한 인자 (아버지와 사람과 같은)가 없으면, 사람은 신만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는 없다.

신은 새로운 행위의 원인일 수도 없고,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 수도 없다.

신은 하늘(즉 세계)을 움직여서 직선운동을 하게 할 수 없으며, 그 이유는 진공이 남기 때문이다.

 

 

- 통일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으로부터 그러한 것을 제거하기도 어려웠고,

그런 부분만을 제거한다고 해도 그의 학문 곳곳에 스며있는 반기독교적인 성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신학자들은 서서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독교 화하는 노력을 기울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독교화보다는 신학이 아리스토텔레스화 하는데 까지 이르게 된다.

단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으로부터 벗어나는 노력도 가져오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었다.

스콜라 신학(神學)에서 구현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사상(思想)에 대해서
 
스콜라신학은 보통 서구 역사(歷史)에서 중세(中世)라고 이름 붙인 시대(616세기)
특징적 신학(神學) 사조(思潮), 또는 신학(神學) 방법론(方法論)을 지칭하는 말이다.
역사의 각 시대는 그 시대와 연관성을 갖고, 이것을 통해 고유의 특징을 갖게 되듯이
스콜라 신학 역시 중세라는 배경에서 나타나고 성장하고 또 쇠퇴해 갔다.
 
이 스콜라 신학은 초기에 캔터베리의 안셀름을 시작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정점에 오르며
윌리엄 오캄(William Ockham, 12851349)이나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701308)에 의해 새로운 사조로 변화하고,
이런 변화가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宗敎改革)으로 이어질 때까지 중세 중기 이후의 사상적(思想的) 흐름을 주도해 나간다.
 
그것의 내용이 어떠했건 이들의 주제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였다.
, 인간이 가진 합리적 사고와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초월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조화될 수 있는가 아니면 서로 다른 범주를 갖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교황 권력의 전성기이자 탁발 수도회들의 설립으로 특징지어지는 13세기는
또한 중세 "스콜라 신학"의 절정이기도 하였다.
이는 나름대로의 특유한 방법론들을 가지고 있었던 신학으로서 "학교"(school)속에서 발전한 신학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기원은 수도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12세기경 신학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성당 부속 학당들은 13세기에 들어서서 대학교들로 대체되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이는 도시들의 발전이 가져온 결과의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신학은 인구 중심지로부터 떨어진 곳에 소재한 수도사들로부터 교회와 주교들과 연관된 성당 부속 학당들로 옮겨졌다.
성당들은 물론 대부분 도시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후에는 중요한 대도시에 모인 학자들의 집결지라 할 수 있었던 대학교가 그 무대가 되었다.
 
스콜라 신학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는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변증법으로, 합리적으로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진리를 판별해 줄 능력을 가진 이성을 사용해서
교회의 교리들이 맞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신앙에 도움을 주려고 했다.
교리가 타당성이 있다는 말은 교리가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소위 존재론적 논증으로 알려진 그의 신존재 증명일 것이다.
그의 저서 서언(proslogion)에서 후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위한 본체론적 이론"이라 부른 학설을 주장했다.
쉽게 말하자면, 안셀름의 주장은
누군가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할 때에 "그는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상상할 수 없는 존재"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과연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상상할 수 없는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사물이 그것보다 더 위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 자체에 의해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존재"는 그 존재 자체를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은 네 변을 가진 삼각형을 말하는 것만큼이나 비합리적(非合理的)이다.
 
이러한 이론의 정확한 해석, 중요성, 그리고 정당성 여부는
이미 수세기에 걸쳐 학자들과 철학자들의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지금도 이러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셀름의 신학 방법론이다.
안셀름은 이미 신앙을 통해 알려진 진리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이성을 적용한 것이다.
안셀름의 논문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Why God Human)에서
자신의 영적 체험인 성육신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 자신의 체험이나 경험을 초월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경험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논리적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합리적으로, 즉 이성을 통해서 설명한 과정이 그의 신학적 논증의 체계였던 것이다.
 
이러한 안셀름의 신학적 입장은 유명론적 입장보다 실재론적 입장에 가깝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특별한 계시로 사람이 그를 경험하는 것을 전제하고 그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건 실재론에서 주장하는 개념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다,
그리고 안셀름은 신앙적 체험이 이성을 통해서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도 사실이다.
스콜라 신학은
바로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인 것을 보면
안셀름에게 스콜라신학의 아버지라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은 온당한 일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이른바 '普遍'의 문제이다.
이는 12세기 초에 대두된 중요한 철학적 과제로서
 
보편적인 개념의 實在를 주장하는 實在論
보편적인 것은 오직 이름뿐이고 실재하는 것은 개별적이라고 주장하는 唯名論과의 대립을 불러일으키고,
양자간에 '普遍論爭'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이 문제에 타당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은 에로이즈와의 사랑으로도 유명한
12세기 전반기의 파리학계의 거장이었던 피터 아벨라르(Peter Abelard)였다.
 
그는 신앙과 이성이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경건함이나 신앙을 전제로 하고 논증하려 하기보다는 논증 자체로 정리하려는 첫 번째 학자였는지도 모른다.
 
, 신학적인 논증에서 신앙을 전제한 것이 아니라 이성만을 통해서 교리나 신학을 논증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의 저서 긍정과 부정(Yes and No)를 보면
158개의 신학적 문제를 제시하고 성경 및 고대 기독교 저술들을 포함한 여러 典據들이 서로 그 해답들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음을 나열했다.
그래서 그 전거들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그 자체의 논증이나 성경의 내용을 따라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것을 주장했다.
 
또한 아벨라르는 그의 저서 신학 서론에서
신학을 신앙, 자비, 성례로 분류하고 있는데,
 
신앙은 보이지 않는 사물들에 대한 의견 혹은 판단이라고 정의하고,
자비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를 통해서 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기독교인들의 모든 행동의 유일한 근본 동기라고 주장하고 있고,
마지막 성례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상징하는 의식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이렇게 정의한다.
진정한 신앙은 지식과 이해를 통하여 획득되어야 한다. 쉽게 믿는 것은 경솔한 인간이다.
 
그는 수도원의 명상이나 경건을 전제로 하고 그의 신학 이론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대학이라는 현실적 삶에서 논쟁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정리했고,
 
또 하나님의 사랑 역시 관념적이나 신학적이 아니라
젊은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그것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보여주신 감정이라고 설명하는 대범함이나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아벨라르는 수도원이나 제도권 교회 내에서만 신앙을 설명하려 했던 중세 중기까지의 신앙 경향을 세상으로 확대시킨 인물이라고 할 수 있고, 중세의 민중 경건 운동을 사상적으로 준비해 온 인물로 평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안셀름과 아벨라르는 한 세기 차이가 나는 인물들이고,
경건하고 명상적인 수도원 분위기에서 학문을 한 안셀름과
대학과 논쟁, 그리고 세상적 사랑으로 스캔들을 일으켰던 아벨라르는 여러 면에서 대비가 되는 인물이다.
둘 다 이성에 대한 신뢰는 갖기는 하였으나
안셀름은 신앙을 전제하고 이성을 통해서 논증하려 하였으나,
아벨라르는 신앙을 전제하지 않고 이성으로 신앙을 논증하려 했다는 데서도 차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밸라르 역시 이성을 중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신앙을 증명하려 한 데서는 중세적인 것을 넘어가고 있지 않다.
 
둘 사이에 여러 차이가 있더라도 이들은 중세 스콜라신학의 장을 개척한 사람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들로 인하여 유럽의 학문적 방법론이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비록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도입되면서 학문의 폭이 넓어지지만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해서 창조적으로 적용하고 새로운 학문적 경향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데에는 이들의 준비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중세에 처음 시작된 학문적 경향인 초기 스콜라 신학을 가장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벨라르의 제자였던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가 쓴 전거집(Books of Sentences)이다.
 
이 책은 교의학 전체를 총괄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개개의 신학적 교의들을 아주 세심하게 배열해 놓고,
어떤 주장에 대해 찬성하는 주장과 반대하는 주장들을 제시한 다음에 그 후에 자신의 대답과 그 근거를 제시해 놓고 있다.
이것은 아벨라르가 했던 방식을 거의 그대로 원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곧 다음 세기에 스콜라신학의 학문 방법론의 발전 과정을 암시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 책이 이후의 중세 전체 동안 신학 교육에서 기본 교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롬바르드는
주장이 대립되어 있고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업을 통해서 많은 주장들이 제기될 수 있도록 했고,
그래서 학생이나 독자가 폭넓은 사고를 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은 중세에 성경 다음으로 주석이 많이 쓰여진 책이 되었다.
그 책 안에 많은 주장과 논쟁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들을 통해서 신학적 질문과 해답의 경향들을 알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셀름과 아벨라르가 시작한 스콜라 신학의 경향이 롬바르드에 의해 정리되고 다음 세대로 이어져 갈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선구자들 외에도 스콜라 신학의 초기 역사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다.
이는 대학교들의 발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이 서유럽에 다시 소개되었다는 사실이다.
 
대학교들은 어떤 면에서 볼 때에 도시 발전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생도들은 주로 인구 밀집 도시들에 모여 처음에는 성당 부속 학당에서, 혹은 또 다른 형태의 학교에서 수업했는데
이들은 "일반 학문 연구소"(general studies)라 불리는 조직체로 연결된다. 이들 속에서 유럽의 주요한 대학교들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대학교라기보다는
그 구성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동시에 이들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취지에서 조직되었던 학자들,
선생들과 학생들의 길드(guild), 즉 조합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서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들은 12세기 말부터 나타난다.
그러나 정작 대학이 학문의 중심지로 성장한 것은 13세기였다.
물론 대학교들은 모두 기본 교육을 실시하였으나, 특정 대학들이 특정 부문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의학을 전공하는 자들은 몽펠리에 혹은 살레르노,
법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이들은 라벤나, 파비아, 그리고 볼로냐 등을 찾았다.
당시 신학의 중심지는 파리와 옥스퍼드였다.
 
이러한 대학들은 조금은 독특한 모습이었다.
왜냐하면 대학은 처음부터 교회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당시에 학생들을 가르칠 만한 학자들은 수도사나 성직자 계층밖에 없었기 때문에 대학은 곧 교회가 주도하는 집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부하려고 모여든 학생들은 대부분 일반인들이었기 때문에
대학은 교회적인 동시에 세상적이라는 독특한 외형적 모습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1229년 툴루즈에 대학이 설립되면서
교황이 비준한 것을 계기로
그 후부터는 모든 대학의 설립에 교황의 비준이 필요하게 되면서
지금까지 수도원이나 성당학교에서 일반인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교회는 대학 교육까지도 관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대학들이 신학을 가장 중심과목으로 놓게 된다.
 
그리고 대학들은 몇몇의 단과대학들로 나누어졌고,
여기서 신학은 '모든 학문의 어머니'라는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2세기 이후로 유럽 전역에는 요원의 불길처럼 대학이 설립되는데, 대학의 번성은 곧 신학의 연구를 뜻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연구는 스콜라 신학의 집대성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스콜라 신학은 모든 학문의 어머니로서의 신학이라는 위치를 확고하게 해 주는 과정에서 체계화되어 갔던 것이다.
 
또 하나 스콜라 신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유럽의 재도입이었다.
2세기부터 특히 서방의 경우 기독교 신학자들은
어거스틴의 학문적 전통, 즉 플라톤주의, 혹은 신플라톤주의적 철학에 익숙해져 있었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들 가운데 일부가 학자들 사이에 읽히고 사용되었으나,
이는 주로 논리학에 관한 것으로서, 초기 중세 신학이 지니는 플라톤적 세계관에 모순되지 않는 정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 그리고 스페인 및 시실리에 거주하던 모슬렘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상이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이에 따라 그의 철학이 일반인들이 생각하였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깨닫기 되었다.
그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유명한 주석가는 아베로에스(Averroes)였는데,
그의 사상의 많은 부분이 서부 유럽으로 들어왔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이 새로운 철학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파리 대학 인문학부에서 뚜렷이 찾아볼 수 있었다.
 
파리 대학교의 몇몇 인문학 교수들은 이 새로운 철학 사상들을 기꺼이 포용하였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주석가 아베로에스의 관점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으므로
흔히 "라틴 아베로에스 학파"(Latin Averroists)라고 불린다.
 
그런데 이들의 철학 속에는 당시 신학자들을 깊이 우려하게 했던 점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점은 이성과 철학은 신앙과 신학의 제한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아베로에스 학파는 이성의 길은 그 궁극적 종착점까지 추구되어야 하며,
설혹 그 결론들이 신학의 그것들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이는 철학자들이 아니라 신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라고 주장했다.
 
신학의 그것들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이는 철학자들이 아니라 신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라고 주장
이런 관점을 통해 전통적 기독교 사상과는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베로에스의 주장들을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이들은 이성에 의하면 물질이 영원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물론 무로부터의 창조 이론에 모순되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모든 영혼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는 물론 개인들의 영혼이 죽음을 초월하여 영생한다는 기독 교리에 어긋난다.
 
일부 신학자들은 전통적 플라톤 주의 혹은 어거스틴적 이론들을 재확인함으로써 이러한 도전에 대응하였다.
예를 들어 13세기의 가장 유명한 프란시스 수도회의 신학자인
보나벤투라(St. Bonaventura)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창조의 교리는 우리에게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며,
이러한 교리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자들은 물질계가 영원하다는 잘못된 결론에 쉽사리 빠진다는 것
 
일체의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로부터 유리된 지식을 주장하는 것은 바로 스스로가 주장하는 지식의 핵심과 근원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베로에스 학파와 전통적 어거스틴 신학 사이에는 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이는 곧 이 새로운 철학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의 보다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위대한 학자인 대 알베르트(Albert the Great)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바로 이 길을 선택하였다.
 
아퀴나스의 스승인 알베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자연은 인간 정신의 가장 완벽한 구현'이라는 명제를 철저히 믿었다.
아마 알베르트의 이러한 태도야말로 도미니크 수도회가 가진 경향성을 가장 잘 나타내 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실험이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신학 경향이자,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가장 완벽하게 조화시켜 낸 인물은
스콜라 신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저술들은 異敎徒를 위한 神學(Summa Contra Gentiles)神學大典(Summa Theologica)이다.
 
신학대전
서로 상충하는 대립적인 의견의 제시를 통하여 문제를 검토해 나가는 아벨라르의 '변증법적 방법'의 가장 훌륭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6백조항 이상의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는 데 1만에 달하는 반대의견을 검토하고 있다.
그가 제기한 첫 항목은 '哲學 이외에 또 다른 敎義가 필요한가'로서
바로 여기에 그가 당면하고 해결하려던 모든 문제의 핵심인 이성과 신앙의 문제가 담겨져 있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있어서 아퀴나스는 알베르트의 이론을 답습하였으나 그의 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정의하였다.
 
그에 의하면, 어떤 진리들은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 내에 있으나 또 어떤 진리들은 이 경계를 초월하여 존재한다.
철학은 첫째 범주만을 취급하지만 (어떤 진리들은 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 내에 있으나)
신학은 후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진리들은 이 경계를 초월하여 존재한다.)
그 이유는 이성으로써 증명할 수 있었으면서도 구원에 필요한 진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적으로 뛰어난 자들에게만 구원을 제한하지 않으셨으므로
이성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것들을 비롯하여 구원에 필요한 모든 진리들을 계시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진리들은 철학과 신학 양쪽에서 모두 탐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이론이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예로서 토마스는 하나님의 존재 여부에 관한 질문을 제기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고는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는 계시된 진리이며, 교회의 권위만으로도 이를 믿기에 충분하다.
아무도 자기 지성의 부족을 이유로 내세울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신앙의 교리이며, 가장 무식한 인간조차도 이러한 기반 위에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물론 하나님의 존재가 이성으로 도달할 수 없는 진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경우 이성은 결국 신앙이 받아들이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서로 다른 방법을 통하여 도달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는 철학과 신학 양측에서 취급하기에 정당한 문제이다.
그뿐 아니라 합리적 탐구는 우리가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진리들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바로 이것이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방법"(five ways), 혹은 하나님의 존재를 위한 이론들의 목적이다.
 
첫째는 어떤 물체가 움직인다는 사실이 관찰된다면 그 물체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 움직이는 모든 것은 그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으로
그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을 운동시키는 제1동자가 존재함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어떠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 나타난 현상은 바로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현상의 원인은 무한정 계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 이것으로부터 제1원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아퀴나스는 감각체험이 가능한 대상들 모두가 일시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런 대상들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치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들 자체에 그들 자신의 존재 원인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문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물체의 존재를 야기하는 어떤 것이 반드시 존재하여야만 한다.
모든 다른 존재의 토대가 되기 위해 존재할 수밖에 없는 本姓을 지닌 이 어떤 것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었다.
 
넷째로 아퀴나스는 사물의 완전성이 사물에 따라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음은 하나님에게서만 있을 수 있는 절대적인 완전성의 기준을 존재함을 가리킨다고 논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자연에서 단순한 우연의 결과라고는 볼 수 없는 순서 바른 사건의 연계(예컨대 씨앗에서 식물이 자라나는 것)를 관찰하게 되는데, 이는 우주를 지배하는 최고 지성이 존재함을 가리킨다고 토마스는 생각하였다.
 
이러한 이론들을 안셀름의 그것과 비교해본다면,
 
안셀름은 감각을 믿지 않았으므로 이 세상의 관찰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관념 자체를 검토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아퀴나스의 이론은 이와는 정반대의 경로를 좇는다.
그는 감각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자료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향해 옮겨가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적 경향과 안셀름의 플라톤주의적 관점이 대조를 이루는 가장 좋은 보기라 할 수 있다.
안셀름은 순수한 관념의 영역 속에서 진정한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반해,
아퀴나스는 감각이야말로 지식의 첫 걸음이라 주장하였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을 당시의 그리스도교 사회의 필요에 적응시켰다.
그는 인간의 진정한 목적은 지상에서의 행복한 상태의 달성이며 합리적인 윤리체계는 이 목적의 달성을 가능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인간의 목적은 그것만이 아니라고 그는 덧붙인다.
인간에게는 보다 높은 목적이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며, 지성의 至上目標는 바로 여기에 있으며,
내세에서의 인간의 구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적인 의 실천만이 아니라, 신앙과 자애라는 그리스도적인 덕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또한 국가가 인간에게 있어 자연스러운 것임을 시인하고,
국가권력의 형태도 자연과 인간의 지상에서의 행복만을 추구한다면 국가만으로 족하겠지만,
인간에게는 내세에서의 신과의 생활이라는 보다 높은 초자연적인 목적이 있고,
교회는 바로 이 목적으로 인간을 인도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아퀴나스는 더 이상 상세하게 정치사상을 전개하지 않았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그의 입장도 애매한 것이지만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을 일단 인정하였다는 사실은
그 후 정치사상의 독자적인 발전에 공헌하였다.
 
스콜라 신학의 쇠퇴는 교황권의 몰락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학문적 성향이 그런 것처럼 스콜라 신학 역시 교회의 세상 지배라는 큰 전제 하에서 나타나고 발전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신학의 대부분 이론들이 스콜라 신학의 시대에 만들어진 틀을 못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동의해야만 한다. 이것은 루터와 칼빈까지도 중세적 시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스콜라 신학의 급격한 추락을 너무 정치적 상황과 연결시키는 것은 옳은 접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스콜라 철학의 내적 흐름만으로도 이를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아퀴나스의 이론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에도 아리스토텔레스를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들은 물밑에서 계속 지속되고 있었다. 위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는 아베로에스 학파는 신학적 지식과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판단 사이에 나타나는 문제들에 대해서 계속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주장들은 큰 세력을 얻지 못한 채 신앙을 전제하지 않은 학문적 시도로 존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결국 이탈리아 르네상스로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런데 아퀴나스의 신학은 역시 서로 경쟁적 관계에 있었던 프란시스 수도회의 수도사들에게 의해 반격을 받게 된다. 이런 비판에 포문을 연 사람은 바로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이다. 그의 비판은 어거스틴적 전제를 가지고 아퀴나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인 지성의 우위라는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아퀴나스가 전제하고 있는 교회와 세상을 하나의 틀 안에서 조화시키고자 하는 전제를 반박하고자 한 것이고 그것의 핵심은 실상 하나님과 인간과의 신앙적 관계는 이론이나 지성적인 어떤 것을 뛰어넘는 영역이기 때문에 이것을 지성을 통해서 증명하는 것이나, 증명할 수 있다고 하는 태도는 불합리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퀴나스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주장은 신존재를 논증하려 했던 중기 스콜라의 체계를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아퀴나스가 신학을 증명하기 위해서 수단으로 사용한 철학을 신학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분리해 냈던 것이다. 신앙과 이성은 서로 다른 영역과 관심을 갖고 있어서 조화될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둔스 스코투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된 이론으로 확장시킨 사람은 동일한 영국 사람이자 동일한 수도회 출신인 윌리암 옥캄(William of Ockham)이다. 옥캄은 철저한 유명론의 입장을 취했다.0) 그는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께 이는 출구가 전혀 없음을 주장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신앙적 진리는 신앙적 진리일 뿐이지 그것이 논증이 된다거나 주어진 사물들을 통하여 유추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옥캄은 같은 종류들에 공동으로 존재하는 보편자 개념을 인정치 않고, 그런 이유로 철저한, 또는 극단적 유명론자로 불리는 것이다.
이러한 옥캄의 신학적 배경인 프란시스 수도원의 가난 사상은 이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제도나 교리가 아니라 직접 말씀하시고, 이 명령에 따르는 삶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옥캄의 주장을 근거로 하면 교회나 교황이나 어떤 다른 권위도 개인의 신앙을 판단하거나 옳고 그른지를 판단한 권위를 잃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인의 신앙이 스스로 확신하는 바에 따라 교황의 잘못을 제기할 수도 있고,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반박할 수도 있는 여지를 열어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공의회나 교황청에서 교리라고 정해 놓은 것이라 하더라도,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 결정이 오류이거나 잘못 판단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옥캄의 주장은 훗날 교황과 카톨릭 교회에 반대하는 여러 운동들, 그리고 종교개혁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런 옥캄의 사상적 틀이 기독교 역사의 가장 큰 분열 사건의 하나인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일으키는 사상적 배경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스콜라 신학이 와해되는 시기는 바로 교황청의 바빌론 유수라고 불리는 시기와 일치하므로 중세 교황권의 몰락기하고 설명해야 할 시기이다. 교황권의 몰락과 스콜라 신학의 와해는 신학의 다른 경향을 요구했다. 전통의 틀과 신학이 채워 주지 못하는 부분을 채워 준 것이 바로 당시에 나타난 신비주의 사상이다. 독일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dt)와 그의 제자 타울러(Tauler)로 대표되는 신비주의 신학은 신비적 감동,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통 등을 주장했다.
 
에크하르트는 아퀴나스가 원용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아니라 다시 신플라톤 체계로 돌아가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새로운 이론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그의 주장의 전제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는 어떤 부분을 남겨두셨으리라는 데서 출발한다. 이것은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 자신이며, 피조되지 않은 것이며, 영원한 것이었다. 이것에다 에크하르트는 영혼의 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면서 이 영혼의 불이 차단되었고, 이 불을 다시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가르친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연합하므로 인간이 영적으로 충만하게 되고, 영혼의 불이 다시 타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향은 교화사나 중세 후기에 대해 알려 주는 바가 아주 분명하다. 이것은 공식과 기준, 이론적 근거를 통해서 신학과 신앙을 규정하고자 하는 중세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알리는 강력한 증거인 것이다. , 에크하르트로 대표되는 중세 후기의 신비주의 경향은 기독교의 신앙을 교회나 성직자들이 공식화되고 정형화된 교리의 틀로 묶으려는 시도로 개인의 신앙을 규정해 주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 중세 후기의 새로운 과학 논의

 

단죄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사조 중에서 중세 과학연구의 방향에 매우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오캄 (William of Ockham, 1285?-1349?)의 학설이었다.

 

오캄은 프란치스코 교단의 수도사로서 철학과 논리학에 능통했던 신학자였는데,

단죄 이후에 나온 신학자들의 노력을 계승하여

신학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아베로에스 학파가 자연 탐구의 영역에서 제한을 가했던 신의 전능과 자유를 강조했고,

따라서 신은 무엇이든지 창조할 수 있으며,

이 창조된 것들 사이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어떠한 필연적 연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오캄은 필연적 연관성의 부재에서 출발하여 모든 지식은 선험적 추론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급진적 경험주의 에 도달했다. 또한 오캄은 보편 개념이란 실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개개의 물체를 나타내기 위한 이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오캄과 단죄의 영향을 받은 중세 학자들 중에는 우주론과 운동이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로부터 상당히 벗어나는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사람은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머튼 학파, 장 뷔리당, 니꼴 오렘이었으며, 이들의 업적은 16, 17세기의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중세에 지배적이었던 우주체계는 지구가 부동이고 그 주위를 달, 태양, 행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항성들의 천구가 돌고 있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체계였다. 그러나 단죄 이후에 나온 14 세기 파리의 유명론자들은 지구의 자전 가능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가장 무거운 원소인 흙을 주요 구성성분으로 가지고 있는 지구가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것은 경험에도 들어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리 대학의 유명론자인 쟝 뷔리당 (Jean Buridan)과 니콜 오렘 (Nicole Oresme)은 지구의 자전을 가정하고도 천체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뷔리당은 별들의 일주운동은 하늘이 지구 주위를 하루에 한바퀴씩 도는 것에 의해서도 설명되지만, 그와 반대로 지구가 그 축을 중심으로 하루 한바퀴 도는 자전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커다란 항성 천구의 운동보다는 그것보다 훨씬 작은 지구의 운동을 통해서 천체 현상을 설명하는 쪽을 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는데, 이러한 논의는 나중에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뷔리당은 경험적 이유에서 지구는 정지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오렘은 지구의 자전 가능성에 관해서 더욱 진지하고 날카롭게 논의했다. 그는 수직으로 던져진 돌이 뒤에 가서 떨어질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지구가 돌 때 공기와 물도 함께 돌기 때문에 돌도 지구와 똑같이 돌며 따라서 그러한 주장은 지구의 자전에 대한 반박으로서 타당하지 않다고 논박했다. 또한 우리가 하늘의 운동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서는 운동의 상대성을 도입해서 반박했다. 즉 그는 바다에서 배 두척이 항해할 때, 배에 탄 사람은 자기 배가 움직이는지 다른 배가 움직이는지 결정할 수 없듯이 지구가 움직이더라도 지구에서는 하늘이 도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하늘이 도는지 지구가 도는지 분명하게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신이 태양을 멈추게 했지 지구에게 정지하라고 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구는 부동이라고 하는 성경에 근거한 반박에 대해서는, 신은 기적을 행할 때 자연의 일반 운행에 혼란이 가능한 한 적게 가해지는 것을 선호할 것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를 위해서 기브온 골짜기에서 멈춘 것은 거대한 하늘이 아니라 작은 지구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는 오캄의 절약 원리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오렘은 여러가지 정교한 논리를 사용해서 지구의 자전을 가정하고도 천체의 현상을 아주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그렇지만 오렘은 이러한 논의를 더 발전시켜 지구가 회전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도는가 하늘이 도는가 하는 문제는 그와 같은 철학적 방식으로는 결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성경의 시편의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않는다 (시편 931)에 근거하여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고 하늘이 일주운동을 한다는 전통적 견해를 고수했다. 오렘은 무엇보다도 프란치스코 교단의 수도사였고, 신학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근본적인 관심은 그러한 과학적 논의를 통해서 새로운 이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철학의 침윤으로부터 건져내는 일이었다. 단죄의 정신에 충실했던 그가 지구의 자전 가능성에 관한 논의를 한 이유는 이성적인 논의로는 참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오렘은 참된 지식이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

 

르네상스 시대

- 보통 15 세기 초부터 17 세기 초에 걸쳐

- 라틴 서양세계에서 학문과 예술이 크게 부흥하는 시기

 

-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 등은 모두 르네상스의 정신적,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사람들이었으며,

-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세례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중세말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던 수공업자와 상인계층의 활동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 결과 개인의 활동이 전보다 더욱 크게 평가받게 되었고, 개인은 교회나 공동체로부터 상당한 해방을 얻게 되었으며, 이러한 개인의 해방과 해방에 대한 욕구에 힘입어 종교개혁이 유럽의 넓은 지역에서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중세와는 다른 좀더 역동적이고 반권위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학문 체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근대 과학도 이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싹틀 수 있었던 것이다.

 

 

 

학문의 발달과 관련이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특징을 개관

 

첫째, 르네상스기에는 중세 스콜라 학풍의 번역과 주해를 거부하고 그리스 원전 자체를 중시하는 경향

- 비잔틴 제국을 여행하여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플라톤, 갈레노스 그리고 아르케메데스 등의 원전들을 찾아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학자들의 문헌뿐만 아니라, 헬레니즘 시대의 신플라톤주의, 헤르메스주의와 같은 신비주의에 관한 문헌들도 발굴.

 

둘째, 중세에는 학문적 저작과 학자들의 대화에서 라틴어만 사용되었던 것에 반해서, 르네상스기에는 민족언어의 사용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당시에 민족 의식이 성장해서 그것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일반인들 특히 사회적 신분이 상승하고 있던 수공업자와 상인들이 그들이 읽을 수 있는 학문적 저작을 요구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학문적 성과를 널리 알리기 위해 자기 민족의 언어로 저작하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고대의 수학과 기술에 관한 저작들도 15 세기 말부터는 민족언어로 출판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장인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에우클레이데스, 아르키메데스, 헤론의 수학과 기술에 관한 저작들이 민족언어로 나왔고, 17세기에 갈릴레이는 자신의 중요한 저작들을 이탈리아말로 썼다. 이러한 출판물들의 보급에는 당시에 구텐베르크에 의해서 발명되었던 인쇄술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세째, 스콜라 학자들은 어떤 이론이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도구로서 논리만을 주로 사용했는데, 르네상스 시대에는 관찰과 실험, 즉 직접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에 따라 직접적인 관찰이 풍부하게 담겨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에 관한 저작과 아르키메데스의 저작들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네째, 교회의 권위와 봉건제가 서서히 쇠퇴하면서 기술이 발달했고, 그 결과 수공업자들의 지위가 상승했다. 과학의 발달과 관련해서는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과학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장인들의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갈릴레이가 쓴 두 개의 새 과학에 관한 논의 는 베네치아의 무기 공장에 관한 묘사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학자들이 수공업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갈릴레이는 또한 자기 자신의 작업장을 가지고 있었고 이곳에서 손수 망원경을 제작했으며, 근대 천문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케플러는 포도주 통의 부피를 재는 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섯째, 신비주의가 널리 퍼졌다. 예를 들어 우주의 신비를 푸는 열쇠는 수학과 기하학에 있다고 하는 신플라톤주의, 우주는 신비적인 힘들로 가득 차 있는 네트워크이고 인간은 이 힘들과 상호작용해서 우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하는 헤르메스주의, 인간이 본질적으로는 우주의 축소판이라고 하는 대우주-소우주 유비관계에 관한 생각, 그리고 성서를 숫자로써 풀려고 했던 카발라 전통과 같은 신비주의가 널리 퍼졌던 것이다.

 

뉴튼의 만유인력이란 개념, 즉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가 서로 끌어당긴다는 생각도 그런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과학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오히려 과학의 발달에 장애요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신비주의도 근대과학이 출현하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헤르메스주의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직후 헤르메스 문헌들(Corpus Hermeticum)이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소개되면서 유럽에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에 사람들은 이 문헌들의 저자가 모세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이집트의 사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토스(Hermes Trismegistos, 삼중으로 위대한 헤르메스)라고 보았으며 이것은 1463년 아탈리아의 인문주의자 마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 1433-1499)에 의해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 문헌들은 성경이 쓰여지기도 전의 것으로 모세와 대등한 또는 더 위대한 현자에 의해서 쓰여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그에 따라 헤르메스주의는 유럽에서 급속히 퍼져가게 된다. 그러나 이 문헌들은 1614년 문헌학자 이삭 카우사보누스(Isaak Causabonus)에 의해서 오래된 이집트의 지혜를 담은 책이 아니라 1세기 경 헬레니즘 시대의 것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후 헤르메스주의는 점차 영향력을 잃고 말았다. 헤르메스주의의 대표적인 가르침은 세 가지로서 하나는 소우주-대우주 유비관계이고, 전체로서의 세계와 세계에 존재하는 만물이 혼을 가지고 있다는 전심론(全心論, panpsychism), 그리고 세계의 각 지점들이 서로 작용한다는 공감-반감론이다.

 

 

 

과학혁명

르네상스 시대 중엽부터 시작된 과학혁명은 유럽의 발전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역사학자 버터필드는 과학혁명의 영향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르네상스 인문주의나 종교개혁은 이에 비하면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고 말했는데, 이와 같이 과학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은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과학혁명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결과만을 따로 떼어서 볼 때 그것은 르네상스나 종교개혁보다 더 큰 영향을 근대 사회에 미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학혁명은 그 내용만을 분리해서, 즉 이에 크게 기여했던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튼 등의 업적만을 분리해서 고찰할 수는 없다. 이들은 모두 르네상스기의 다양한 사건이나 사조의 영향을 풍부하게 받았다. 따라서 과학혁명은 앞에서 말한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가지 새로운 분위기가 점차로 익어감에 따라 일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과학혁명은 과학 전반 또는 과학의 일 부문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과학혁명은 르네상스 시대 중엽, 16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굳이 연도를 든다면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체계를 내세운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가 발표된 1543년에 시작되어 뉴튼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가 출판된 1687년에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때까지 널리 받아들여져 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체계가 거의 대부분 새롭고 근대적인 것으로 변혁되고 말았다. 우주론과 천문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 우주체계가 코페르니쿠스-케플러의 태양중심의 우주체계로 완전히 바뀌었으며, 역학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스콜라 학파의 역학이 갈릴레이-뉴튼의 역학으로 대체되었다. 생리학에서는 중세에 완벽한 권위를 행사했던 갈레노스의 체계가 하비의 새로운 생리학 이론으로 바뀌었고, 과학의 방법과 과학활동이란 면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프란시스 베이컨, 데카르트, 갈릴레이가 새로운 과학연구 방법을 제시했고, 영국의 왕립학회, 프랑스의 과학아카데미 등 과학자들이 모여 집단적으로 발표하고 토론하는 과학단체들이 출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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