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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대사

서양사학과, 방통대 역사학과 등 교양 필수 서양고대사 핵심 요점 요약 정리 Ⅻ. 로마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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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문화

. 특색

 

1. 실용적 실천적: 정치, 행정, 군사 면에서의 재능(통치 수단인 법, 도로 발달)

2. 절충적, 종합적. 보편적, 대중적 문화: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의 전달, 계승

 

. 건축과 토목

 

1. 건축: ‘빵과 서커스의 정책의 표현-콜로세움, 개선문, 공중목욕탕

아치(arch)와 돔 사용

2. 토목: 도로, 수도교(水道橋) ex.가르(Gard) 수도교, 세고비아 수도교

 

.

 

1. 로마법 대전(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편찬

2. 로마법의 발전: 시민법만민법자연법

 

. 문학(웅변, 역사 기술 등의 산문)

 

1. 산문: 베르길리우스(Vergilius): 아이네이스(Aeneis) 2

 

2. 철학

1) 스토아 철학-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2) 에피쿠로스 철학-루크레티우스(Lucretius)

3) 후기에는 신플라톤주의 사상

 

3. 역사

1) 카이사르(Caesar)-갈리아전기

2) 플루타르코스(Plutarchos)-영웅전

3) 리비우스(Livius)-로마사

4) 타키투스(Tacitus)-게르마니아

5) 폴리비우스(Polybius)-로마발전사

 

. 종교

 

1. 특징

1) 원래 에트루리아와 그리스의 영향후일 오리엔트의 종교도 유입

2) 다신교로 온갖 종교의 경연장이라 할 수 있음

3) 결국 크리스트교를 국교화

 

2. 로마의 전통 종교: 누미나 (정령신앙)판테온의 신들

1) 국가 종교 형성: 신관은 일종의 공무원 -최고 신관 Pontifex Maximus,

2) 야누스, 제니우스 등의 토착신들 + 유피테르, 유노 등의 에트루리아 신들 + 그리스 12+ 소아시아 계통의 키벨레 여신, 아티스신 + 이집트 계통의 이시스, 세라피스신 + 이란 계통의 미트라신 등(종교와 철학의 분리 현상)

3) 제우스를 믿는다는 것은 윤리적인 것의 고양을 의미하지는 않음

4) 신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새, 동물의 내장을 통해 점치는 것이 유행(auspices, haruspices)

5) 황제 숭배 사상: 관제 종교

Caesar는 자신을 divus라 부름(deus-divus)

옥타비아누스는 동방에서 신으로 숭배

Domitianus는 거부자 처형

Commodus '나는 신이다󰡐

신총제(神寵帝) 이념: 3세기 세련된 황제 숭배 사상, 황제는 신 자체가 아니라 신 Jupiter의 대변자

6) 제정 말기에 이르러 각종 이교는 신 플라톤 철학과 연결되면서 제설 통합주의(synchretism)적 경향을 띰

 

3. 크리스트교

 

1) 성립과정과 의의

성립: 유대의 전통 하에 Tiberius 황제 때 출현

발전 과정: 3세기도 안 되는 시기에 로마제국의 정신적 세력 지배, 4세기에는 국교화 이후 중세 문화 사회의 기초를 마련

*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AD 29): 보수적 유대인의 반발, 열심당 Zealot은 예수를 종교범에서 정치범으로 몰아서 로마인들에게 사형을 요구

Jerusalem 교단-베드로 중심

Hellenes 교단-바울 중심, 세계 전도화. 범세계적 사랑

의의: 헬레니즘과 더불어 서양 사상의 2대 근간

2) 크리스트교의 외부적 박해 원인

황제 숭배 거부 등의 정치, 군사적 요인

카타콤베에서의 비밀 집회에 따른 의혹, 불신, 오해

3) 특색: 성육신Incarnation, 속죄 Atonement, 구제와 사랑, 최후의 심판, 내세, 신분 막론, 크리스찬이라는 공동체 의식, 황제 숭배 거부

4) 크리스트교의 수용 과정

박해: 네로, 도미티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최대의 박해, 순교자 수 최대-Galerius)

공인: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기 313년 밀라노 칙령

교리 확립: 325년 니케아 종교 회의(아리우스 논쟁삼위일체의 아타나시우스파 채택됨)

아리우스: 로고스의 진짜 성육신은 불가, 시작이 없는 분은 성부뿐이며, 성자는 한때 존재하지 않는 때가 있었음 즉 半神적인 능력, 성자는 지음을 받은 분으로서 능력과 지혜에 제한이 있음

아타나시우스: 절대 구원은 하나님에게서만 올수 있다는 것, 즉 반신으로서는 안됨, 성부와의 동질(homoousios) homoios(유사함)의 논쟁

국교화: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로마 서커스 정치의 대표적 유흥거리: 검투사 경기

 

1) 검투사의 유래

검투사는 라틴어로 글라디아토르(Gladiator)라고 불렸으며, 투기장에서 싸우는 투사를 뜻함

명칭의 유래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에스파냐를 점령한 후 에스파냐 원주민의 검 글라디우스를 채택했는데, 검투사 중에 일부가 이 무기를 사용했던 것에서 기인했다고 함

 

2) 검투사의 기원설

에트루리아 기원설: 로마 이전의 에트루리아인의 제물 의식을 로마가 채용한 것이라는 설로 이 이론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로는 문헌사료를 들 수 있음

캄파니아 기원설: 캄파니아에서 검투사 경기가 시작되어 에트루리아를 거쳐 로마로 전해졌다는 이론, 그 증거로는 이탈리아 최초의 원형경기장이 캄파니아 지역에서 발견되었으며 최초의 검투사 경기 장면을 묘사한 벽화가 나왔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고 있음

 

3) 검투사 시합의 초기 역사

기록상 가장 오래된 검투사 시합은 기원전 264년에 로마에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데키무스 형제가 아버지의 장례식 즈음하여 보아리움 광장에서 검투사 경기를 개최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가 벌어진 해에 밀리우스의 장례식에서 검투사 경기가 개최

기원전 200년에는 죽은 발레리우스의 세 아들이 25쌍의 검투사가 싸우는 장례식 경기를 4일간 벌임

역사학자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74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프라미니우스(Titus Quinctius Flamininus)가 주최한 74인의 검투사로 이루어진 투기 대회가 특히 주목할 만 했다고 저술

기원전 2세기에는 원형경기장이 건설됨에 따라 도시 로마 안에서의 검투사 경기는 주로 포로 로마노에서 열리게 됨

 

4) 검투사 경기와 정치

추도를 목적으로 한 시합은 규모가 더욱 커졌으며, 고인을 추도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볼거리로써 행해지게 되면서 정치가의 프로파간다(선전)을 위한 이벤트로 변질

민중은 검투사 경기에 열광했고, 정치가에게 이를 개최해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추도 검투사 시합은 공직 선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됨

투기 대회가 점차 지나칠 정도로 화려해져 갔으며, 이를 걱정해 투기 대회의 개최일수와 검투사의 수를 규제하기 시작했으나 준수되지 않았고, 민중들도 규제가 준수되지 않는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음

공직 선거와 투기 대회가 연착되는 현상은 제정 초기까지 계속됨

ex)카이사르가 주체한 검투사 경기

 

5) 제정시기의 검투사 경기

아우구스투스는 재위 중에 8번 투기 대회를 주최하여 1만 명의 검투사를 싸우게 하였고 다른 경기와 합치면 3500 마리의 맹수를 죽임

티베리우스 황제는 반대로 한 번도 볼거리를 개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기가 없었다고 함

칼리굴라 황제와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검투사 시합을 성대하게 개최

네로 황제는 전차경기나 연극을 좋아했다고 함

80년에는 베스파시아누스의 명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콜로세움)이 티투스 황제시기에 완성

티투스 황제는 콜로세움의 준공식으로 대규모 투기 대회를 개최하였으며, 맹수 사냥과 검투사 시합, 그리고 모의해전이 100일에 걸쳐 진행

트라야누스 황제는 1만 명의 검투사를 모아 투기 대회를 개최

콤모두스 황제는 스스로 검투사가 되어 735회나 싸우기도 함

도미티아누스 황제시대 이후, 도시 로마에서는 투기 대회의 개최는 벼슬아치인 관리관이 관장하게 되었으며, “대양성소(Ludus Magnus)”, “갈리아 양성소(Ludus Gallicus)”, “다키아 양성소(Ludus Dacicus)”, 그리고 조조(早朝)양성소(Ludus Matutinus)”4군데 제국 양성소가 설립

크리스트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고나서는 교회에서 검투사 경기를 반대함에 따라, 경기의 규모의 규모가 축소되고 인기가 떨어졌으며 훈련생도 모이지 않게 됨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투기장을 폐쇄시킴

523년에 이탈리아를 지배하게 되는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검투사 대회를 금지한다는 포고를 내림

681년에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검투사 경기가 소멸

 

6) 검투사가 되는 사람들

로마에 패배한 전사들

처벌받는 범죄자들

자원한 자유민들

여성 검투사들

 

7) 검투사 양성소(Ludus)

노예든지 자원한 자유민이든지 검투사가 될 사람들은 라니스타(lanista)가 소유한 검투사단(familia gladiatorial)에 속하게 됨

검투사 양성소에서 장기간에 걸친 훈련을 받고 대회에 출전

검투사 양성소에서는 기술을 지도하는 전직 검투사 출신의 도크토레(Doctore)나 교사(Ludi Magister), 고도로 숙달된 의사나 마사지사 등이 있어 검투사 양성에 힘씀

도크토레는 검투사들에게 행진하는 법에서부터 무기를 다루는 법, 발기술, 찌른 검으로 어떻게 동맥을 찾는지 등을 지도하고 철저히 훈련시킴

검투사들은 기본적으로 목검을 들고 연습했으며, 짚 인형을 상대로 덤비는 연습, 훈련생끼리 연습시합 등으로 경험을 쌓아감

목검으로만 훈련했던 이유는 반란의 위험을 막기 위함과 부상을 방지하기 위함

훈련을 따라오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가혹한 벌이 주어졌기에,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자도 있었음

훈련생들의 기숙사는 엄중한 감시 하에 놓여있었으며 밤에는 열쇠로 잠가둠

식사는 영양가 좋은 식사를 제공했으며, 고대 로마에서는 보리를 먹게 되면 지방이 불어나 출혈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보리를 주식으로 식사를 제공

검투사들의 생활이 반드시 외부와 차단되었던 것은 아니어서 연인을 가질 수도 있었고, 가족을 꾸린 검투사도 있었음

 

8) 검투사 경기

사열식: 경기에 앞서 벌어지는 것으로 경기에 투입되는 야생동물, 공개처형될 범죄자들, 오후에 싸우는 검투사들의 면면을 보여주는 행사

오전 일정: 야생동물과의 싸움

정오 일정: 살인, 방화, 신성모독 등의 죄목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죄수들을 처형함, 이때 로마 시민들은 단칼에 처형되고 비시민은 십자가형, 화형, 야생동물로 처형됨

오후 일정: 경기의 정점인 검투사 경기를 행해짐, 사전경기조 추첨과 무기 검사검투사 경기

 

9) 검투사의 종류

일대 일로 싸우는 검투사는 기본적으로 5가지 종류로 분류

트라케스(Thraces): 트라키아 사람 풍의 무장을 한 검투사, 구부러진 모양의 시카(Sica) 도나 팍스(Falx)를 무기로 했으며, 장비는 작은 원형이거나 작은 사각형 방패를 사용, 양쪽 다리에는 허벅지 길이의 레그 가드를 착용, 머리에는 크레스트(Crest)라는 닭 벼슬처럼 생긴 장식이 붙고 그리폰이 새겨진 투구, 기원전 1세기에 등장했으며 트라키아 출신의 스파르타쿠스는 이 트라케스였을 것으로 추측

삼니테(Samnite): 삼니움 사람 풍의 장비를 착용한 검투사, 커다란 크레스트 장식이 붙은 투구를 쓰고 긴 직사각형 방패와 쇼트 소드 혹은 창을 들었으며 왼쪽 다리에 레그 가드를 찬 중장비 검투사, 기원전 2세기에 등장, “무르밀로도 삼니테 유형에 속한다고 보는데 무르밀로가 출현함과 동시에 삼니테는 줄어들었으며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대부분 소멸

무르밀로(Murmillo): 물고기를 본뜬 투구를 착용한 검투사, 로마 군단 병사가 사용한 직사각형 긴 방패를 들고 글라디우스를 무기로 사용, 팔 보호대를 착용했으며 성기 보호구와 벨트를 착용, 오른쪽 다리에는 발 상단까지 두껍게 덮는 각반을 착용

레티아리이(Retiarii): 어부처럼 그물과 삼지창 혹은 작살을 사용, 적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한 단검을 가지고 싸움, 다른 검투사와 다르게 투구를 쓰지 않았으며 또한 방패도 들지 않음, 커다란 팔 보호대가 어깨와 가슴 한쪽을 덮거나 청동으로 만든 어깨 방패를 착용해 목과 얼굴 아래를 보호하며 싸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발전했으며 맨얼굴이 드러내기 때문에 늠름하고 젊은 사람이 많았음

세크토르(Secutor): 추적자로 레티아리이에 대항하기 위해 발전, 무르밀로와 닮은 장비를 걸치고 커다란 로마 군용 직사각형 방패와 찌르기를 위한 곧은 검신의 글라디우스 장비, 두 개의 작은 눈구멍을 제외하고는 얼굴 전체를 투구로 보호

이외의 검투사들: 베스티아리이(Bestiarii), 디마카에리(Dimachaeri), 에퀴테(Equite), 글라디아트릭스(Gladiatrix)

 

10)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검투사의 시합이 크게 흥행했던 기원전 73년에 카푸아의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최대 규모의 노예 봉기를 일으킴

70인의 검투사들이 탈주를 감행하여 시작된 이 사건은 12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전쟁으로 규모가 커졌으며 이탈리아 반도를 뒤덮음

반란군은 로마병 포로에 검투사 시합을 강요했는데 이를 고대 역사학자 오로시우스는 이제껏 볼거리 취급을 당했던 이들이, 이제는 관객이 되었다고 기술

기원전 71년에 스파르타쿠스 반란군은 크라수스에 의해 진압되어 전멸

진압으로 붙잡힌 6,000명의 포로들은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형으로 공개 처형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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